02. 권리를 가질 수 있음과 스스로 거래할 수 있음
열일곱 살 학생이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을 주식에 전부 투자하는 계약을 맺었다고 해 보자. 학생도 통장과 휴대전화를 소유하고 임금을 받을 권리가 있다. 그렇다면 모든 계약을 성인과 똑같이 확정적으로 맺을 수도 있을까?
법은 ‘권리를 가질 수 있는가’와 ‘자기 판단으로 법률효과를 확정할 수 있는가’를 다른 질문으로 나눈다. 이 구별이 권리능력과 행위능력이다. 말이 닮아서 헷갈리지만, 둘 사이에는 사람을 권리의 주체로 존중하는 일과 판단이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사람을 보호하는 일이 함께 들어 있다.
권리의 그릇과 행동의 스위치
권리능력은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자격이다. 민법은 사람이 생존한 동안 그 주체가 된다고 정한다. 갓난아이도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고 손해배상청구권을 가질 수 있다. 스스로 계약서를 읽지 못한다는 이유로 권리의 주체가 아닌 것은 아니다. 태아는 원칙적으로 아직 사람과 같은 일반적 권리능력을 갖지 않지만, 상속이나 불법행위 손해배상처럼 법률이 특별히 정한 경우에는 이미 출생한 것으로 보아 이익을 보호한다. 다만 이 보호는 태아가 살아서 출생한 경우에 비로소 확정된다는 조건까지 함께 보자.
행위능력은 혼자서 유효하게 법률행위를 확정할 수 있는 지위다. 현재 민법상 성년은 열아홉 살에 이른다. 미성년자가 법률행위를 하려면 원칙적으로 법정대리인의 동의가 필요하고, 동의 없이 한 행위는 취소할 수 있다. 여기서 ‘무효’가 아니라 ‘취소할 수 있다’는 표현을 눈여겨보자. 취소되기 전에는 효력이 남아 있고, 법정대리인이 나중에 추인하면 확정적으로 유효해질 수 있다.
의사능력은 사람마다, 행위마다 살핀다
의사능력은 자기 행동의 의미와 결과를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을 가리킨다. 나이를 딱 잘라 정하는 행위능력 제도와 달리, 의사능력은 구체적인 사람과 행위, 당시 상태를 살핀다. 같은 사람도 일상적인 물건 구매는 이해하면서 복잡한 보증계약의 결과는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의사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한 법률행위는 유효한 의사에 기초하지 못하므로 무효가 문제 된다. 반면 제한능력자의 행위는 법이 정한 보호 장치에 따라 취소할 수 있다. 결론이 비슷해 보여도 길이 다르다. 하나는 애초에 의미 있는 의사결정이 있었는지를 묻고, 다른 하나는 거래 유형을 일일이 따지지 않고 일정한 사람을 제도적으로 보호한다.
보호에는 예외와 상대방의 안전장치도 있다
미성년자가 권리만 얻거나 의무만 면하는 행위에는 법정대리인의 동의가 필요하지 않다. 법정대리인이 범위를 정해 처분을 허락한 재산도 미성년자가 스스로 처분할 수 있다. 용돈으로 책을 사는 일을 매번 취소 가능하게 만들면 보호보다 생활의 불편이 더 커질 것이다.
한편 거래 상대방도 언제까지 취소를 걱정해야 하는지 알 필요가 있다. 민법은 제한능력자의 상대방에게 일정 기간 안에 추인 여부의 확답을 요구할 권리 등을 둔다. 제한능력자 보호와 거래 안전을 함께 맞추려는 장치다. 제한능력자가 속임수로 자신을 능력자로 믿게 한 경우에는 취소가 제한될 수도 있다.
‘법인격’이라는 개념은 ‘권리의 그릇’을 사람 밖으로 넓힌다. 회사 같은 법인은 자연인과 별개의 권리·의무 주체가 될 수 있다. 자연인의 권리능력과 법인의 법인격은 범위와 발생 방식이 같지 않지만, 법이 누구를 독립된 주체로 세우는지 묻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런 글에서
“사람은 생존한 동안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된다.”
— 국가법령정보센터, 「민법」 제3조
‘사람’과 ‘주체’ 사이를 곧장 잇는 문장이다. 여기에는 판단 능력이 부족해도 사람을 권리의 바깥으로 밀어내지 않는다는 생각이 담겨 있다. 그다음 행위능력 제도가 구체적인 거래의 안전과 보호를 조절한다.
출제 이력
출제 이력
교육청 · 2021년 9월 전국연합학력평가(고1) — 의사능력과 제한능력자
한눈에 정리
세 능력을 한 줄로 구별해 보자
권리능력 → 권리·의무의 주체가 될 자격
의사능력 → 그 행동의 의미와 결과를 이해할 실제 능력
행위능력 → 혼자서 법률행위를 확정할 수 있는 제도상 지위
동의 없는 미성년자 행위 → 원칙적으로 취소 가능
권리만 얻거나 의무만 면하는 행위 → 동의 불필요
생각해 볼 거리
미성년자가 고가의 운동화를 현금으로 산 경우와 부모에게서 받은 범위 안의 용돈으로 참고서를 산 경우는 왜 다르게 평가될 수 있을까? 보호와 거래 안전의 두 관점에서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