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그림의 내용보다 먼저 오는 것
한 그림에 폭풍 속 배가 그려져 있다고 하자. 우리는 난파의 사연을 궁금해할 수 있다. 그런데 조금 물러나면 화면을 가르는 대각선, 푸른색과 주황색의 충돌, 거칠게 반복되는 붓질이 먼저 보인다. 같은 작품을 두고도 ‘무슨 이야기인가’와 ‘어떤 형식으로 작동하는가’는 다른 질문이다. 형식주의와 표현주의는 예술이 어디에서 힘을 얻는지 서로 다른 곳에 조명을 비춘다.
형식은 내용이 담긴 빈 그릇이 아니다
형식은 선·색·형태·질감·비례·구도·리듬처럼 요소들이 조직된 방식이다. 형식주의는 작품 바깥의 일화나 교훈보다 작품 자체의 감각적·물질적 관계에 집중한다. 빨강이라는 색 하나보다 그 빨강이 주변의 회색과 어떤 대비를 만들고, 반복되는 곡선이 눈을 어디로 이끄는지가 중요하다.
형식주의의 장점은 작품을 자세히 보게 한다는 데 있다. 유명한 작가의 삶을 몰라도 화면 안의 균형과 긴장, 반복과 변화를 설명할 수 있다. 문학에서 장치의 이름만 찾지 않고 그 장치가 리듬과 의미에 무슨 일을 하는지 보는 태도와도 닮았다. 미술에서도 무엇이 선명한지와 그것이 감상자의 시선을 어떻게 이끄는지를 물으며 요소와 기능을 붙여 읽어 보자.
표현주의는 닮음보다 내적 진실을 밀어 올린다
표현주의적 태도는 외부 세계의 정확한 외양보다 정서와 충동, 주관적 경험을 강하게 드러내는 데 무게를 둔다. 형태를 찌그러뜨리고 색을 현실과 다르게 쓰는 것은 실수라기보다 보이지 않던 불안이나 열망을 보이게 하는 전략일 수 있다. 이때 화면의 왜곡은 대상을 버린 것이 아니라 대상과 맺은 관계를 새로 조직한 것이다.
다만 ‘거친 붓질=분노’, ‘어두운 색=슬픔’처럼 기호를 고정하면 작품을 놓친다. 같은 검정도 애도·권위·공허·화면의 균형을 각각 만들 수 있다. 표현은 형식 없이 전달되지 않으며, 형식은 아무 정서도 만들지 않는 중립적 용기가 아니다.
두 관점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형식주의를 지나치게 좁히면 역사와 사회, 작가와 관객의 경험이 지워진다. 표현주의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면 작품을 작가의 감정 일기로만 읽게 된다. 실제 감상에서는 두 질문을 이어 보자. 어떤 감각 요소가 어떻게 배열되었나. 그 배열이 어떤 정서적 압력이나 태도를 만들어 내나.
음악에서도 마찬가지다. 빠른 리듬과 높은 음이 흥분을 만들 수 있지만, 주변의 느린 부분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따라 해방이 되기도 하고 공포가 되기도 한다. 형식은 정서를 조직하고, 표현은 형식이 향하는 방향을 보여 준다.
이런 글에서
“Theories of art that concentrate on the sensory or material qualities of the work itself are called formalist.”
— Formalism I: formal harmony, Smarthistory
형식주의는 특정 시대의 화풍 이름이라기보다 작품 자체의 감각적·물질적 성질에 집중하는 이론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추상화뿐 아니라 초상화와 영화도 형식주의적으로 읽을 수 있다.
출제 이력
출제 이력
평가원 · 2021학년도 9월 모의평가 — 형식주의 비평과 표현론
한눈에 정리
형식과 표현의 두 렌즈
형식주의 → 작품 안 요소들의 관계와 조직에 초점
표현주의 → 주관적 정서·충동·경험의 드러남에 초점
형식 → 선·색·질감·비례·구도·리듬
주의 → 색과 붓질의 뜻을 고정 공식으로 만들지 않기
연결 → 형식이 정서를 조직하고 표현이 방향을 만든다
생각해 볼 거리
가사를 모르는 외국 노래에서도 슬픔이나 긴장을 느낄 수 있다면, 그 느낌은 소리의 형식에서 얼마나 오고 우리가 아는 문화적 관습에서 얼마나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