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대치동에서 상담을 했습니다.
수학 고정 1등급, 영어 1등급. 누가 봐도 공부 잘하는 이과생이에요.
근데 국어만 4등급.
상담 자리에서 제가 물었습니다.
학생이 멈칫합니다. "음... 서로 이해하는 관계...?"
틀렸습니다. 이해관계는 이익과 손해의 관계예요. 경제학적 용어입니다.
이 단어가 3년 전에도 평가원 선지에 나왔고, 올해 3모에서도 나왔습니다.
이걸 모르면 선지 판단 자체가 안 돼요.
이 학생만 그런 게 아닙니다.
최근 상담한 고3 다섯 명에게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수학 1등급부터 재수생까지, 다섯 명 전원이 정확하게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반음과 온음의 차이가 뭐예요?" — 대답 못함.
"형사절차에서 체포와 구속의 차이?" — 대답 못함.
어머님, 이게 국어 성적이 안 오르는 진짜 이유입니다.
제가 상담할 때 이 말을 꼭 합니다.
영어 성적을 올리려면 뭘 해야 합니까? 문제만 풀면 됩니까?
아닙니다. 단어를 외워야 합니다. 단어를 모르는데 독해가 될 리가 없잖아요.
국어도 똑같습니다.
한글이라서 읽히니까 착각하는 거예요.
글자를 읽을 수 있다는 것과,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영장실질심사의 청구권자가 수사기관으로 한정된다"라는 문장을 소리 내어 읽을 수야 있겠죠.
하지만 '영장실질심사'가 뭔지, '청구권자'가 뭔지 모르면 이 문장은 사실상 외국어입니다.
실제로 한 학생에게 물어봤습니다.
"precision이라는 영어 단어 뜻이 뭐예요?" 모르겠다고 해요.
"그런데 이 단어가 문장 안에 들어 있으면 어떻게 해요?"
"앞뒤 문맥 보고 추론하죠."
국어 지문 읽을 때도 똑같은 걸 하고 있는 겁니다.
"이해관계"라는 단어의 정확한 뜻을 모르니까, 앞뒤 문맥으로 대충 추론하는 거예요.
근데 영어에서 단어 뜻을 대충 추론하면 어떻게 됩니까?
때로는 맞고, 때로는 틀리잖아요.
국어 성적이 들쭉날쭉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매번 추론 도박을 하고 있는 거예요.
고전소설도 마찬가지입니다.
해리포터 원서를 영어로 읽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해리포터 스토리가 어렵습니까? 아닙니다. 스토리 자체는 중학생도 이해할 수 있어요.
근데 영어 원서로 읽으면 왜 어렵냐? 단어를 몰라서 못 읽는 겁니다.
고전소설도 그래요.
"사신(使臣)", "태후(太后)", "봉명사신(奉命使臣)" — 이 단어들 뜻을 알면 고전소설은 드라마보다 쉽습니다.
뻔한 이야기거든요. 이산, 성장, 재회, 영웅담.
근데 단어를 모르니까 전혀 다른 언어처럼 느끼는 겁니다.
국어 성적은 두 가지 축으로 결정됩니다.
배경지식과 어휘력입니다.
"환율이 오르면 수출에 유리한가 불리한가?" — 이걸 아는 학생과 모르는 학생이 같은 경제 지문을 읽으면 속도와 정확도가 완전히 다릅니다. 이게 체급 차이예요.
수능 국어에서 나오는 지문은 법, 경제, 철학, 과학, 음악, 역사 — 사실상 모든 교과가 통합되어 있습니다.
이 배경지식이 없으면 지문을 처음부터 해독해야 하니까 시간이 모자랄 수밖에 없어요.
복싱에 비유하면 이해가 빠릅니다.
체급이 좋다는 건 기본 체력이 좋다는 거예요.
국어에서는 어휘력, 배경지식, 기본적인 독해 속도가 체급입니다.
출제자의 관점에서 문제를 푸는 절차입니다.
평가원이 선지를 어떻게 설계하는지, 함정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지문의 어떤 부분과 선지의 어떤 표현이 대응하는지 — 이런 걸 구조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이 기술입니다.
체급만 좋으면? 감으로 풀게 됩니다.
한 지문 날리면 3등급, 두 지문 날리면 5등급.
이게 바로 "감국어"의 함정이에요. 체급은 있는데 기술이 없으니까 매번 운에 의존하는 겁니다.
기술만 좋으면? 배경지식이 없는 분야의 지문이 나오면 무너집니다.
아무리 좋은 풀이법을 알아도, "이원론"이 뭔지 "형이상학"이 뭔지 모르면 적용할 수가 없어요.
둘 다 올려야 탑클래스입니다.
그래서 저는 상담할 때 학생한테 직접 물어봅니다. 어휘부터.
"이해관계가 뭐예요?", "청구권이 뭐예요?", "환율이 오르면 뭐예요?"
여기서 막히면 체급부터 올려야 하는 겁니다.
문제를 더 많이 푸는 게 답이 아니에요.
영어 단어 안 외우고 영어 문제만 푸는 거랑 똑같거든요.
이 말을 하면 학부모님들이 많이 놀라십니다.
근데 진짜예요. 수학을 잘하는 머리면 국어를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수학에서 조건을 정확하게 읽고, 논리적으로 따져서, 답을 도출하는 거잖아요.
국어도 완전히 같은 구조입니다.
답을 머릿속에서 뽑아내야 하는 게 아니라, 지문에서 찾아내야 하는 거거든요.
이과 학생들이 이걸 알면 직관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실제로 작년에 수업했던 학생 중에,
수학 고정 1등급인데 국어 2등급 상위권이었던 친구가 있습니다.
기술, 그러니까 출제자 관점의 풀이 절차를 체계적으로 잡아줬더니
수능에서 100점 맞았어요. 전국 200명.
제가 "너 이번 수능에서 100점 나오겠다"고 했는데, 진짜 100점이 나온 거죠.
그 학생이 특별히 천재였을까요? 아닙니다.
체급이 이미 좋았고, 기술만 올렸을 뿐입니다.
수학 1등급이면 논리적 사고력은 이미 검증된 거예요.
거기에 국어 시험만의 기술 — 출제자가 선지를 어떻게 설계하는지, 어떤 함정을 심는지, 시간을 어떻게 배분해야 하는지 — 이것만 잡으면 됩니다.
이번 3월 모의고사에서 충격받으신 학부모님 많으실 겁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번 3모는 평가원 출제 기준으로 봐도 좀 극단적이었습니다.
도파민 지문은 해외 병리학 서적을 번역해서 넣은 수준이었고,
국어 강사들 사이에서도 "이거 시간 내로 100점 맞기 어렵다"는 얘기가 나왔어요.
그러니까 이번 점수 자체에 너무 충격받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시험에서 받은 충격이 "뭔가를 바꿔야겠다"는 동기가 된다면, 그건 정말 좋은 겁니다.
수능까지 남은 시간을 계산해 볼까요?
지금이 4월입니다. 수능까지 약 7개월, 210일 정도 남았어요.
하루에 국어 2시간만 쓰면 420시간입니다.
독서 지문 한 세트를 제대로 분석하는 데 20분이면, 1,260세트를 풀 수 있어요.
40개년치를 세 바퀴 넘게 돌릴 수 있는 시간입니다.
문제는 방향입니다.
420시간을 "기출 문제만 반복해서 풀기"에 쓰면, 지금이랑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영어 단어 안 외우고 영어 문제만 계속 푸는 거랑 똑같으니까요.
그 시간의 절반을 체급 — 어휘, 배경지식, 한자어 — 에 쓰고,
나머지 절반을 기술 — 출제자 관점의 풀이 절차 — 에 써야 합니다.
5등급에서 3등급까지는 보통 한두 달이면 됩니다.
체급이 올라오면 읽는 속도 자체가 달라지거든요.
3등급에서 1등급은 두세 문제 차이예요. 거기서는 기술이 갈라놓습니다.
정확하게 "이익과 손해의 관계"라고 대답하면, 체급은 있는 겁니다.
기술만 올리면 됩니다.
"서로 이해하는 관계" 비슷한 대답이 나오면,
지금 국어 공부의 방향을 점검해야 합니다.
문제를 더 많이 푸는 게 답이 아니에요. 단어부터 채워야 합니다.
하나만 더 물어보세요.
여기서도 막히면, 경제 지문은 매번 도박인 겁니다.
이게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학교에서 안 가르치거든요.
수능 국어는 모든 교과의 배경지식을 전제로 출제되는데,
정작 그걸 체계적으로 가르쳐주는 곳은 거의 없어요.
그래서 어휘력 좋고 독서량 많은 학생은 아무 준비 없이도 1등급이 나오고,
그렇지 않은 학생은 아무리 기출을 돌려도 제자리인 겁니다.
차이는 재능이 아니라 어휘입니다.
그리고 어휘는 외우면 됩니다.
영어 단어 외우듯이, 국어 어휘를 채우면 됩니다.
거기에 출제자 관점의 풀이 기술까지 잡으면,
수학 잘하는 이과생이 국어를 못할 이유가 없어요.
수능까지 7개월. 체급과 기술을 동시에 올리기에 충분한 시간입니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상담 한 번 받아보시는 것도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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