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7 수능완성 · 실전5회
병원 생활 속 환자 정체성과 기괴한 안온감
이 자료는 입원한 화자가 환자복, 치료 절차, 병동 풍경을 통해 자신이 환자가 되어 가는 과정을 체험하는 장면이다. 병원은 차갑고 폭력적인 공간처럼 느껴지면서도, 어느 순간 화자에게 한가롭고 안온한 생활 공간처럼 받아들여지는 양가적 공간이다.
공식 지문 원문
EBS 2027 수능완성 실전5회 p.247[18~21]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앞부분 줄거리] '나'는 습성 늑막염을 진단받고 한 병원에 입원한다.
내가 정말로 아프기 시작한 것은 늙은 간호원이 병실 앞에 내 이름이 새겨진 문패를 걸어 준 후, 수의 같은 환자복을 주었을 때였다. 누가 입던 환자복이었는지 몰라도 체구에 맞지 않는 환자복을 입고 우두커니 서 있는 꼬락서니는 평소에 생각하던 자기의 이미지를 완전히 깨뜨려 버리기에 충분하였으며, 내 얼굴엔 완연히 병색이 드러나 보이기 시작했다. 누구의 부축 없이는 변소에도 가지 않았고, 의사만 보면 공연히 매어달리고픈 충동을 받곤 했다.
입원한 다음 날, 한 떼의 의사들이 병실로 몰려와, 겁에 질려 있는 나를 전범 다루듯 사납게 벽 쪽을 향하게 한 다음, 주삿바늘로 옆구리를 찔러 굉장한 양의 노르께한 액체를 빼내었고, 나는 집행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유난히 하얀 병실 벽을 마주 바라보며 그들의 작업이 끝날 때까지 약간 울고 있었다.
그리고 작업을 끝마치고 사라져 가는 그 집행인들의 흰 가운에서 병실 벽처럼 차디찬 체온을 절감했다.
나는 이렇게 입원 생활을 시작했으며, 어느 틈엔가 아침이면 체온계를 입에 물고 사탕을 깨물세라 조심스럽게 녹이는 유아처럼 체온을 재는 모범 환자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입원한 지 일주일쯤 후부터는 어느 정도 병이 차도를 보이기 시작해서 열도 정상으로 내려갔고, 더욱이 내 병은 가벼운 폐결핵에서 기인된 늑막염으로 까짓 폐결핵이야 요새 약들이 좋으니까 감기 정도로 생각해 두면 틀림없다는 의사의 말투에, 한편은 불안도 하고 한편 위안도 되어, 언제는 반쯤 남기던 죽을 꾸역꾸역 모조리 긁어 먹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차츰차츰 결핵에 걸린 자신이 실감되어 오고, 아무리 약이 좋다고 하나 앞으로는 긴 시간 창백한 얼굴로 낙엽 구르는 소리에도 눈물을 흘려야 하는 폐병 환자 노릇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억울해져서, 나는 몇 번이고 세면대 긴 체경 앞에 서서 메기처럼 눈을 껌벅껌벅이며 혼자 울었다.
그러나 도대체 병이라면 어디를 만지면 통증이 오고, 어디를 움직이면 감지할 수 있는 감각이 와야 할 텐데, 이건 어디를 만져도 아프지 않고, 그저 오후만 되면 끈적끈적한 늪지대에 빠져 버린 듯한 미열만 오는 것으로, 좀 후에는 에잇 모르겠다는 안이한 체념으로 시간 맞추어 밥을 먹고, 빈 시간이면 잠을 자는 입원 생활에 만족하게 되어 버렸다.
입원 생활은 금붕어 같은 생활이었다. 모든 환자들은 양순한 민물고기처럼 조용히 지느러미로 미동을 하면서 병원을 부유하고 있었다. 나는 이 붕어 같은 병원 생활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오랜 방황 끝에 고향에 닻을 내린 범선처럼 나는 한가로웠고, 그리고 즐거웠다.
(중략)
그러다가 반대편에 서서 어둠에 웅크리고 있는 병동을 바라보면 참으로 기괴한 감격에 싸여 버리는 것이었다. 병동은 파도가 밀려오는 철 지난 해변에 서 있는 방갈로처럼 우울하게 해감 냄새를 피우고 있었다. 모든 병실엔 형광등 불빛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으며 그 유리창 너머로 환자들의 움직이는 모습이 내다뵈는 것이었다. 마치 우리가 투명한 바닷물 속을 들여다볼 때, 그 속에 수많은 해초와 생물이 수런거리고 있는 것처럼 모든 병실이 제각기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보육기 속에서 생명을 키워 가는 유아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생생한 경이였다.
일 층, 이 층, 삼 층, 사 층, 모든 병동은 밤에도 환히 눈을 뜨고 있었다. 간호원들은 병실과 병실 사이를 부산스레 헤매고 있었고, 간혹 의사들은 '비상'을 알리는 주번 하사 같은 기민한 동작으로 층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균을 잡아먹는 백혈구와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의 무표정하고 뻣뻣한 얼굴에서, 균을 거부하는 강력한 항생제의 효능을 느껴야 했다.
그즈음, 나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입원한 이후 저들의 얼굴에서 웃음을 발견치 못했다는 중대한 사실이었다. 그런 생각은 참으로 불쑥 일어난 느낌이었다.
언젠가 나는 외국 잡지에서 잘 인쇄된 화장품 광고를 본 일이 있었다. 그 광고는 남자들이 면도 후에 바르는 미안수를 선전하고 있었는데, 나는 지금도 그리스 조각처럼 잘생긴 그 남자가 유난히 파르스레 빛나는 턱 위에 지극히 자연스럽고도 세련된 웃음을 띠고 있는 모습을 기억해 낼 수 있다. 그것은 일종의 심리적인 광고여서, 그 잘 깎은 턱과 웃음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그 미안수를 사지 않고는 못 배길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만일 그 사내가 그 최면술 거는 듯한 매혹적인 웃음을 제거하고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면, 나는 그 화보가 미안수 선전 광고라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그 병원 의사들은 미안수 선전 광고에 나올 만한 사내들이 미소를 결여하였음으로 하여, 자기 병원 왕래를 권장하는 무표정한 히포크라테스의 모델로 아깝게 전락해 버린 듯 보였다. 그들은 일 초의 주저함도 없이 내장을 자르고, 뼈를 긁을 수 있는 권위를 보여 주는 모델로서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들이 만약 외무 사원처럼 웃으며 환자의 증세를 물어본다면, 그 환자는 얼마나 심리적인 위안을 받을 것인가.
이리하여 나는 그들을 웃기기 위해서 고용된 사설 코미디언 같은 무거운 책임 의식을 갖게 되었고, 밤낮으로 그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를 알아내려 애를 썼다. 나는 스스로의 청진기를 들고 그들을 진단하기 시작했고, 웃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소인이 그들의 어느 부분에서 강하게 생겨나는가 하는, 임상 실험의 과정에 굉장한 열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나 가령 어느 한 곳이 가려울 때, 정확히 그곳을 집어서 긁어 주는 쾌감이라든지,
어린애가 사과를 먹고 싶어 할 때는 직접 사과를 사다 주면 충족한 웃음을 볼 수 있다는 프로이트의 가장 기본적인 이드와 에고 학설을 응용해서 그들을 웃겨 보려던 나의 첫 번째 시도는 곧 좌절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난히 가려운 곳도 없었고, 무언가 가지고 싶은 욕구 본능도 퇴화되어 버린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잠을 자야 할 땐 수면제를 먹었으며, 배가 고플 땐 의사 전용 식당에서 영양이 풍부한 햄버그스테이크를 뜯었다. 소화가 안 될 땐 소화제를 먹었으며, 음악이 듣고 싶으면 환등실에서 발랄한 간호 학교 학생들과 구운 토스트를 씹으며 음악을 들었다. 피로할 땐 가루 비타민 C를 물에 타 먹었으며, 성욕이 고개를 들면 간단히 진통제로 말살해 버렸다. 도대체가 그들은 충분한 영양을 취하고 있는 온상 속의 귀족 식물이었던 것이다. 며칠이 지나도 나는 그들이 가려워하는 곳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 최인호, 「견습 환자」
*전범: '전쟁 범죄인'을 줄여 이르는 말.
*체경: 몸 전체를 비추어 볼 수 있는 큰 거울.
* 미안수: 피부에 수분을 주어 피부 표면을 다듬는 화장수. = 로션.
읽기 전 관점
- 환자복과 문패는 화자가 스스로를 환자로 인식하게 만드는 계기이다.
- 의료진과 치료 장면은 차갑고 위압적인 이미지로 제시된다.
- 화자는 병에 대한 불안과 위안을 동시에 느낀다.
- 병원 생활은 금붕어, 바닷속, 보육기 같은 비유를 통해 기묘한 안온감으로 표현된다.
핵심 흐름
- 환자복 장면입원 체험의 시작
자기 이미지가 깨지고 환자 정체성이 형성됨
- 치료 장면공포와 무력감 형상화
의료진이 전범을 다루듯 절차를 진행함
- 차도와 불안위안과 억울함의 공존
상태는 좋아지지만 결핵 환자 노릇이 실감됨
- 금붕어 생활안이한 체념과 안온감
규칙적이고 조용한 입원 생활에 만족함
- 밤의 병동기괴한 생명감 제시
병동을 바닷속, 보육기, 백혈구 이미지로 바라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