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7 수능완성 · 실전1회
만화경과 맥: 상실 이후의 기억
이 자료는 외아들을 잃은 노년 인물이 만화경과 꿈을 먹는 짐승 맥의 이미지를 통해 상실과 불안을 마주하는 장면이다. 만화경은 아이의 세계를 훔쳐 보고 싶은 욕망과 기억의 분열을, 맥은 나쁜 꿈과 죽음 이후의 두려움까지 흡수하고 싶은 심리를 드러낸다.
공식 지문 원문
EBS 2027 수능완성 실전1회 p.149[28~31]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앞부분 줄거리] 시청 하급 관리로 일하다가 정년퇴직한 '그'는, 20년 전에 외아들 영로를 잃고서 늙은 아내와 쓸쓸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는 만화경을 눈에 갖다 대고 빙글빙글 돌렸다. 잘게 자른 색종이 조각들이 거울 면의 굴절에 따라 모였다 흩어지며 여러 가지 꽃 모양을 만들었다.
만화경 속의 조화는 현란하지도 신기하지도 않았다. 홑잎과 겹잎 꽃의 단순한 집합과 확산일 뿐이었다. 옛사람들은 만화경을 돌리며 우주의 원리와 이치를 본다고 했다.
엊그제였던가, 점심 산책에 나선 그가 주택가 골목을 벗어나 큰길에 이르렀을 때 그는 주위를 집요하게 맴돌며 따라오는 빛 무늬를 보았다. 어깨와 다리, 가슴팍에 함부로 와 닿는 빛을 털어 내며 눈살을 찌푸렸으나 하얗게 번뜩이는 그것이 길과 사람들 사이로 정령처럼 춤추며 뛰어다니다가 다시금 그에게로 되돌아와 얼굴에 오래 머무르자 그는 문득 얼굴이 졸아드는 공포를 느꼈다. 센 빛살에 눈을 뜨지 못하며 그는 소리쳤다. 누구냐, 거울 장난을 하는 게. 그때 쨍쨍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아이가 미장원 층계에 앉아 있었다. 아이의 손에는 날카롭게 모가 선 거울 조각이 들려 있었다. 다치면 어쩌려고 그러니. 그러나 아이는 말했다. 유리 가게에 가서 동그랗게 잘라 달라고 하면 된대요. 내일 유치원에서 만화경을 만들 거예요. 만화경은 뭐든지 다 보이는 요술 상자래요. 그러면서 아이는 길을 건너 달려갔다. 뭐든지 다 보인다고? 그는 아이의 등 뒤에 대고 물었으나 물론 진정한 호기심은 아니었다. 단지 의미 없는 되물음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어제 낮, 그는 놀이터의 벤치에서 그 애의 가방과 함께 놓인 만화경을 보았다. 집으로 오는 동안을 참지 못해 도중에 유치원 가방을 팽개쳐 두고 자전거 가게로 달려가는 그 애의 버릇을 그는 알고 있었다. 아이는 이 요술 상자를 통해 무엇을 들여다보았을까. 그는 아이의 눈이 되어 아이의 눈에 비친 모든 것을 보고자 하는 욕망으로 만화경을 집어 들었다. 그것을 품에 감추고 어제 오후 내내 그는 잃어버린 만화경을 찾기 위해 헛되이 모래 더미를 헤치는 아이를 지켜보았다. 내 만화경을 누가 훔쳐 갔어요. 전시회에 낼 거라고 선생님이 그랬는데요. 아이는 울면서 벌써 수십 번이나 들여다보았을, 가방과 만화경이 놓였던 긴 의자 밑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뭐든지 볼 수 있대요. 그는 아이의 말을 흉내 내어 중얼거리며 빠르게 만화경을 돌렸다. 돌리는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유리와 거울과 색종이가 어울려 모였다 흩어지는 모양이 다양해졌다. 그것은 어쩌면 빠른 속도로 분열하고 번식하는 병원균과도 같았다. 색종이의 선명한 색감 때문인지도 몰랐다.
(중략)
치약 묻힌 칫솔로 표면에 달라붙은, 칼국수를 먹고 난 뒤의 고
춧가루 따위 찌꺼기를 꼼꼼히 닦아 내자 틀니는 싱싱하고 정결하게 빛났다. 틀니의 잇몸은 갓 떼어 낸 살점처럼 연분홍빛으로 건강해 보였다. 그는 헐떡이며, 치약 거품을 가득 물고 허옇게 웃고 있는 이빨들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으로, 청년처럼 검은 머리는, 무너진 입과 졸아든 인중, 참혹하게 파인 볼 때문에 더 젊어 보였다.
방으로 돌아온 그는 틀니가 담긴 물컵을 머리맡에 놓고 퇴침을 베고 누웠다. 잠에 빠지는 과정은 언제나 어둑신하고 한없이 긴 회랑(回廊)을 걸어가는 것과도 같았다. 어쩌면 이미 혼백이 되어 연도(羨道)를 걸어가는 것이나 아닐까.
열린 방문으로 아내의 모습이 빤히 보였다. 혼곤하게 빠져드는 가수 상태에서 아내의 손은 반죽을 궁굴려 몸체를 만들고 귀와 뿔을 세우고 꼬리와 다리를 만들어 붙였다. 그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상한 형체였다. 아내는 그것을 이미 만들어진 다른 것들과 나란히 볕이 드는 마루턱에 세우며 웅얼웅얼 낮게 중얼거렸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흉몽에 시달리셨다우. 머리가 깨질 듯 아프다고 했어요. 흉몽 때문에 머리가 아픈 건지 머리가 아파서 나쁜 꿈만 꾼 것인지는 그분 자신도 몰랐어요.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를 하고 장님에게 경을 읽히기도 했지만 그 무서운 두통을 낫게 하지는 못했어요······ 이름난 대목이었다는 아내의 조부 이야기는 그도 몇 차례인가 들어 알고 있었다...... 새벽이고 밤중이고 흉한 꿈에 눌려 비명을 지르고 깨어나면 머리가 아파서 미친 사람처럼 온 집 안을 뒹굴며 다녔지요. 할머니는 그 양반이 묏자리에 집을 많이 지어 그런 거라고 말했지요. 그는 회랑의 어슴푸레한 모퉁이에서 흰 끈을 머리에 동이고 비명을 질러 대는 등 굽은 노인의 뒷모습을 본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이상한 짐승의 모양을 손칼로 깎았지요. 코끼리 같기도 하고 곰 같기도 하고 아무튼 참 이상한 모양이었지요. 맥()이라던가, 나쁜 꿈을 먹는 짐승이래요. 중얼거리는 동안에도 아내의 손이 쉼 없이 반죽을 떼어 내어 형체를 만들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것을 타구와 함께 머리맡에 두었어요. 때문에 타구에 가득 괸 가래 침은 마치 맥이 밤새 먹고 이른 새벽에 토해 놓은 흉몽과 같았지요. 할아버지는 관 속에 맥을 같이 넣어 달라고 유언을 하셨어요. 죽은 후에도 나쁜 꿈에 시달릴 것을 겁내셨던 모양이에요. 죽은 사람도 꿈을 꾸는 걸까. 어린 내게는 그것이 퍽 이상했는데 지금은 할아버지가 그러셨던 걸 이해할 수 있어요. 옛날 사람들은 자기가 쓰던 물건, 부리던 하인들의 모양까지 흙으로 빚어 무덤 속에 같이 넣었다잖아요? 아내의 조부는 이제 길고 희미한 시간의 회랑 끝에서 편안히 잠들어 있다. 머리맡에 맥을 세워 두고. 어쩌면 그에게 최면을 걸 듯 느릿느릿 낮게 읊조리는 아내의 말소리에 손을 잡혀 그는, 더러는 어슴푸레 떠오르는 시간 속을 자꾸 걸어간다. 그것은 마치 감광제가 고루 발리지 않은 필름과도 같다. 어느 부분은 저 홀로 발광체인 듯 환히 빛나며 뚜렷이
떠오르고 어느 부분은 아주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굳이 잊혀진 것을 되살리고자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것은 늙은이에게 주어진 보잘것없는 특권인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지금 주춤거리고 섰는 이곳은 어디인가. 언젠가 가 보았던 박물관의 전시실 같기도 했다.
그곳은 토우(土偶)나 동경(銅鏡) 따위 죽은 사람들의 부장품들만을 진열한 방이었다. 땅속에 묻혀 천년 세월을 산, 이제는 말끔히 녹을 닦아 낸 구리거울을 보자 그는 자신이 아주 오래전에 죽은 옛사람인 듯 느껴졌었다. 관람객이 한 명도 없이 텅 빈 전시실에는 두꺼운 양탄자가 깔려 있어 자신의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었기 때문이라고, 어둡고 눅눅한 회랑을 걸어 나오며 그는 잠깐 스쳐 간 괴이한 기분에 대해 변명하였다.
영로를 묻었을 때 그는 그가 묻고 돌아선 것이, 미쳐 가는 봄빛을 이기지 못해 성급히 부패하기 시작한 시체가 아니라 한 조각 거울이었다고 생각했었다.
- 오정희, 「동경」
*연도: 고분의 입구에서 시체를 안치한 방까지 이르는 길. *가수: 의식이 반쯤 깨어 있는 상태로 자는 잠. *대목: 큰 건축물을 잘 짓는 목수. 혹은 '목수'를 높여 이르는 말. *타구: 가래나 침을 뱉는 그릇. *토우: 흙으로 만든 사람이나 동물의 상. 종교적 - 주술적 대상물, 부장품, 완구 따위로 사용하였다.
읽기 전 관점
- 주인공은 외아들을 잃고 늙은 아내와 쓸쓸하게 살아가는 인물이다.
- 아이의 만화경을 가져오는 행동에는 아이의 시선과 세계를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이 담긴다.
- 만화경 속 조각의 모임과 흩어짐은 기억과 불안의 분열을 떠올리게 한다.
- 아내가 만드는 맥은 흉몽과 죽음의 공포를 먹어 주기를 바라는 상징물이다.
핵심 흐름
- 앞부분 상황상실의 배경 제시
외아들 영로를 잃은 노년의 쓸쓸함
- 만화경상실 보상의 매개
아이의 시선을 빌려 세상을 보고 싶은 욕망
- 분열 이미지불안과 기억의 형상화
색종이 조각이 모이고 흩어지는 모습
- 틀니와 거울노년의 불안 제시
몸의 노쇠와 낯선 자기 인식
- 맥 이야기죽음과 악몽에 대한 대응
나쁜 꿈을 먹는 짐승을 만들어 두려움을 막으려 함